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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짜0 2014. 4. 1. 16:58

 

 

훼손되고 방치된 이곳, ‘폐가’의 놀라운 정체

등록 : 2014.03.23 20:49수정 : 2014.03.24 17:45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로 사용됐던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폐가에서 김석태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 부서진 처마를 가리키고 있다.

[현장 쏙] 홀대받는 ‘120돌 동학혁명’ 유적지

1894년 농민들은 봉건제도를 뜯어고치고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어섰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2갑(120년)인 해다. 일본의 우경화 행보가 노골화되는 지금 동학농민군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는 폐허로 방치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숨진 이름 없는 농민군들의 무덤 봉분은 무너졌지만 돌보는 이가 없다.

쓰러질 듯한 집의 녹슨 철제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에는 매매를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대문 옆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항아리, 의자, 생수 상자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붕의 기와는 푹 꺼져 내려앉으려 했고, 마루의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하늘이 바로 보였다. 주인 잃은 신발과 이불 등이 먼지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10여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탓에 을씨년스러웠다.

■ 폐가로 방치된 동학농민군 집강소 지난 19일 오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4의 3(봉황로 5)을 찾았다. 언뜻 평범한 폐가로 보이지만 이곳은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였다. 방 4칸짜리 이 건물은 1970년대 지붕이 초가에서 기와로 바뀌었을 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이곳은 현재 땅 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이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조선왕조 발상지이자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는 농민군이 거둔 가장 큰 성과이자 조선왕조에 대한 도전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주민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산이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 설치됐다.

1894년 11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마을 야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에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 무덤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관리가 안돼 봉분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 집 상량문(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려놓는 상량식에 쓰는 축문)에는 ‘광서 8년 임오 3월20일’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광서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로 광서 8년은 1882년을 뜻한다. 실제 백정 출신 ‘동록개’라는 사람이 동학정신에 감명을 받아 김제 원평의 대접주(동학의 군·현 단위의 대단위 조직인 ‘접’의 책임자) 김덕명 장군을 찾아와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집을 농민군에게 헌납해 농민군 집강소로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원도연(50) 원광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집강소는 농민이 주장한 세금·토지 개혁정책안을 실천했고 신분해방까지 나아가는 등 대동세상을 실현했다. 1980년 5월 광주가 10일 동안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공동체를 지켜낸 것처럼, 집강소 3~4개월도 이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952㎡(288평) 규모인 이 집의 주인이 3.3㎡(1평)당 100만원가량에 매매를 원하고 있어 매입하려면 3억원 가까이 들 것으로 보인다. 김덕명 장군의 증손인 김석태(70)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은 “3억원만 있으면 건물 보전이 가능할 텐데 이렇게 방치해 선조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동학혁명 유적지는 땅이라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지만, 집은 지붕이 무너지면 형체가 망가져 금세 허물어진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인 20년 전에도 각 기관에 이런 사정을 알렸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봉준 장군이 부하의 밀고로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에서 붙잡힌 장소는 안내문이나 표지석도 없는 등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

■ 봉분도 찾기 어려운 농민군 최후 전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마을 야산에는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 무덤 20여기가 남아 있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패배한 뒤 이곳까지 후퇴해 관군·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전투지인 이곳에서 농민군 수십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농민군의 주검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봉분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있다. 2005년 태풍에 나무가 쓰러지는 바람에 봉분이 훼손되고 있다. 지금도 뿌리가 뽑힌 채 쓰러진 나무가 그대로 방치돼 있다. 김제시가 지난해 12월 무덤 들머리에 안내판을 만들어 그나마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게 했다.

최고원(44)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어렸을 때는 이 무덤의 봉분 형태가 그나마 남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2008년에 나무말뚝에 숫자를 써서 18개를 박아놓았다. 이마저도 없으면 일반인들은 아예 무덤인지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에 창립한 유족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전사한 농민군들을 추모할 수 있는 일정한 무덤 형태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김개남 장군 고택 터도 방치되고 있다.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이다. 김개남 장군 증손 김종기(62)씨는 “동학 때 증조부님 댁에서는 농민군 3000명이 3일 동안 밥을 먹고 갈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 그 많은 재산이 온데간데없다.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짚으로 만든 돗자리) 자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된 고택 터를 사서 복원을 하려고 해도 전북도와 정읍시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재단 관계자는 “전봉준 장군 고택은 1981년에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김개남 고택 터는 문화재 지정이 안 돼 올해 120주년을 맞아 정비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안내판도 없는 녹두장군 전봉준 체포 장소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전봉준 장군 단소에는 기념비가 너무 많아 이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단소는 주검이 없는 허묘를 말한다. 동학농민혁명 60주년인 1954년에 천안 전씨 종중에서 여기에 비석을 세웠다. 민간에서 처음 세운 동학농민혁명 기념비였다. 이후 여러 민간단체들이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 추가로 비석을 세워 9개가 더 들어섰다. 전해철(79)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전 장군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법인을 만들었다. 주변 땅을 구입해서 기념비 9개를 한쪽으로 옮겨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념비가 넘치는 단소와 달리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체포 장소)는 아예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전 장군이 부하의 밀고로 붙잡힌 피체지는 빈집으로 남아 있다. 이곳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2005년에 세워진 피체지 전시관이 있다. 그러나 정작 전 장군이 붙잡힌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지석은 없다.

피체지 전시관에도 설명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다. 전봉준 장군의 무덤이 없는데도 무덤 사진이 붙어 있는 등 역사적 사실이 일부 틀리고, 기술한 내용과 사진도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병규(4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동학혁명과 관련이 없는 공주성 사진이 있고, 같은 사진을 여러 차례 반복해 붙이는 등 전체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것저것 갖다 붙인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개남 장군이 전주천 근처 곤지산 자락 초록바위에서 처형됐으나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다. 다만 초록바위를 설명하는 표지판의 맨 아래 부분에 김개남 장군 설명이 딱 한 줄 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훼손이라는 말이 적확하지 않다. 무관심으로 방치돼 훼손할 게 없기 때문이다. 관리가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적지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를 보면,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총 353건 가운데 279건은 사적, 시·도지정 문화재 등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혁명 120돌과 2004년에 만들어진 동학농민혁명특별법 제정 10돌을 맞아 혁명 관련 선양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역사학자 이이화(77)씨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4대강 사업 한다고 동학 관련 단체 예산을 10~20%씩 깎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로만 일본 우익 교과서 채택과 아베 신조 총리 발언을 문제삼으면 무엇하느냐. 동학농민혁명이 우리가 일본군과 싸운 역사다. 동학혁명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선양사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글·사진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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