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그의 행적을 직접 찾아다니며 쓴글과 다산이 지은 맑고 아름다운 시들과 함께 마치 대숲을 거닐듯 초가 삼간 집에 앉아있는듯 다산의 마음속에 다녀올 수 있는 책.
다산(1762-1836)의 시는 모두 7언으로 된 한시형식으로 모두 한자로 표기하는 한계를 보여주는데 다산보다 앞시절을 산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한글로 많은 시와 시조를 남겨 오히려 시대를 후퇴한 느낌이 든다.
무릇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시해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재물이야말로 메기 같은 물고기라고나 할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내 의지를 밝히다> 중에서
슬프다, 우리나라 사람들
주머니 속에 갇혀서 사는 듯
삼면은 바다로 에워싸였고
북방은 높고 큰 산이 굽이쳐 있네.
사지 삭신 언제나 움츠려서
기상과 큰 듯 어떻게 채워보리.
성현은 만 리 밖에 있는데
누가 이 몽매함 열어줄까.
머리 들어 인간 세상 바라보아도
보이는 사람 없고 정신은 흐리멍덩
남의 것 모방하기에 급급해
정밀하게 숙달함을 가릴 겨를 없구나.
뭇 바보들이 천치 같은 한 사람 받들고
왁자지껄 모두 함께 받들게 하네,
순박한 옛 풍속을 지녔던
단군의 세상만도 못한 것 같네.
428p
< 강진 어부들의 노래>
계랑포에 봄이 오면 뱀장어 많기도 해
곧바로 활배를 푸른 물결에 띄운다.
높새바람 불어대면 일제히 나갔다가
마파람 급히 불면 그때가 돌아올 때라네.
세물 때 겨우 지나 네물 때 돌아오면
까치파도 물결에 엣어대 잠기네.
어촌의 사람들 복어만 좋다 말하면서
농어는 다 털어 술과 바꿔 마시네.
<매조도>
유배 10년째 부인이 보내준 분홍색 농지기 치마를 잘라 일부를 시집가는 딸에게 글과 그림을 남김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
475p
< 다산화사>
대밭속의 부엌살림 중에게 의지하니
가엾은 그 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480P
<전간기사> 1810년 대흉년 다음해에 쓴 시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날때 쯤의 상황 배경을 보여주는 시같다.
다산은 홍경래의 난을 임금에 대한 역적모의로 보고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글을 썼다고 한다.
짝지어 다니는 아이 있는데
한 애는 총각머리, 한애는 댕기머리.
총각머리 아이는 말 배우고
댕기머리 아이는 머리를 늘어뜨렸네.
어미 읽고 울면서
저 갈림길에 있네.
붙들고 까닭을 물었더니
목에 메어 말을 더듬네.
아버지는 이미 유랑하고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다오.
쌀독이 바닥나서
사흘을 굶고는
우리와 함께 우는 엄마
턱에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네.
아이가 젖달라고 울어대나
젖마저 말라붙었네.
우리 엄마 내 손 잡고
이 젖먹이와
저기 저 산마을에 가서
동냥해서 우리 먹이고
물가 시장 데려가서는
엿도 삭서 먹이고는
길가 나무그늘에 이르러서는
어린 짐승같이 아이 껴안으니
애는 깊이 잠이 들고
나는 죽은 듯 잠들었다오.
잠을 깨고 두리번거렸으나
엄마는 거기에 없었다오.
가뭄에 너무 많은 인명피해를 보고 < 파리에게 조의를 표함> 이란 산문을 지어 죽은 영혼들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