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 1750 | 1825 | 미국의 독립선언(1775), 프랑스 혁명(1789-99) 귀족으로부터 중산층으로의 힘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때. | ||||||
1774 | 산소및 수소발견 | ||||||||
모짜르트 | 1756 | 1791 | 18세기 중엽 고전주의-예술을 갖가지미로 규정하고 벗어나는것을 금지 다비드, 앵그르 | ||||||
베토벤 | 1770 | 1827 | 19세기내내 낭만주의가 이어짐 | ||||||
영조 | 1694 | 1776 | |||||||
정조 | 1752 | 1800 | |||||||
박지원 | 1737 | 1805 |
| 중구 순화동,의주로2가일대. 서인,노론의명문가.아버지가관직없었음 | |||||
1739 | 형 박희원장가.16형수이씨가어린 박지원돌봄 | ||||||||
홍대용,박제가등과함께 청나라의우수한점을 배워야한다며 상공업을중시하는 중상주의 주장. | 노론의한분파인북학파 | 1752.16세 | 결혼,처삼촌과장인에게 학문시작 | 영조의부마이자청나라다녀온8촌형박명원영향받음 | |||||
제자-박제가,유득공, 이덕무 | 1754 | 우울증,불면증고생 사람들청해재밌는얘기들으며고치려했으나 실패 | 말동무 민유신-오랜친구가됨-민옹전주인공.단편 광풍자전 | ||||||
1758.22세 | 박제가,이서구,유득공등과 친교 | ||||||||
1760 | 할아버지타계-집안곤궁 | 가족들은그라과거에나가길원함 | |||||||
1761 | 요양차 북한산 삼국지,수호전,일본서적,중국서적탐독 수염은백색,새치 | 성균관에사마시험보러가서 답안지에 고목,노송만그리고나옴 | |||||||
1765 | 과거응시 1차장원,2차백지. | 가을친구 김이중이나귀팔아 마련해준돈으로 금강산 유람-"석정해돋이"글 열하일기에수록 | |||||||
여러번 과거낙방,과거단념, 학문과저술전념, 성리학, 시,그림에능통 당색으로는 노론인데 사회의 부조리와 폐단을 지적한탓 | |||||||||
1767 | 아버지사망 | ||||||||
1770 | 초시합격,2차에백지 | ||||||||
1776 | 정조즉위직후 | 정조측근 홍국영세도잡고같은노론이지만 벽파공격 | 벽파인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짐 | ||||||
박지원이 살았던 시기는 영 · 정조시대로 일컬어지는 문예부흥기였다. 개혁을 추진하려는 두 왕이 탕평 정책을 펴고 또는 온건한 방법으로 통치했기에 일컬어진 말일 뿐 실제로 봉건사회의 내면은 더욱 곪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가 더욱 문란해지면서 대토지 소유가 점점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조세와 지대(地代) · 공납은 영세 자작농 또는 소작농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일부 지배층에서는 노비 소유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노비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했고, 국가와 노주(奴主)들은 도망한 노비를 추쇄(推刷, 찾아서 잡아들이는 일)하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금고(禁錮)를 벗기 위해 여러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정치 ·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특권 양반지배층에 대해 소외되고 몰락한 향반들의 불평은 늘어가고,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유리걸식하고, 노비들은 추쇄를 피해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서 숨고, 이런 틈을 서학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 1777.정조1년 | 벽파로몰려홍국영에게 위혐 당하자 황해도 금천,연암협으로 은거 | |||||||
1780.정조4년,44세 | 삼종형 박명원따라 청나라 방문 |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 |||||||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 열하-지금의 청더.Chengde |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있을 때 그는 물레방아를 관찰,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 그는 물레방아를 수차(水車)라 했고, 여러개의 모사본을 그렸다가 11년 뒤 안의현감이 되어 함양 땅에 물레방아를 설치한다.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일 귀국하였다. | |||||||
1786 | 주변 권유로 음보(과거가아닌 출신으로 채용제도) 공조(工曹)는 고려와 조선의 행정기관이다. 육조 가운데 국가의 토목공사, 공예품과 도량형의 제작, 산림과 소택 관리, 교통업무 등을 관장하였다. 오늘날의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 등에 해당한다. 그는 옷소매를 줄이고, 군사훈련을 하고, 정병을 양성하며, 군사물자 비축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해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 이후 재혼과 첩을 두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혼자 지냈다. 이어 형 박희원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 ||||||||
1788 | 1788년(정조 12년) 전염병이 돌았다. 그해 며느리 덕수 이씨가 전염병에 걸려 의원을 불러왔지만 효험도 없이 죽고, 아들 박종의도 위독했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가족들과 하인, 주변인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후처를 얻거나 첩을 얻으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해, 반송방의 집을 처분하고, 그때마침 사촌 동생 박수원이 선산부사로 부임하면서 계산동 집을 빌려서 생활하였다 | ||||||||
평시서 주부,사복시 주부를맡음 | 1789 | 평시서(平市署)는 도량형(度量衡)과 시장, 유통, 물가를 조절하는 등 시세의 조절을 맡던 관청이다 사복시(司僕寺)는 왕이 타는 말, 수레 및 마구와 목축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이다 | |||||||
금부도사(의금부수사기관) | 1790 | 박명원의 부음 | |||||||
한성부 판관(실무, 중급관리) | 1791 |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북벌론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음을 꾸준히 지적하였다. 청나라로부터 괘종시계, 태엽시계, 자명종, 망원경, 안경 등을 본 뒤로 그는 조선의 수준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뒤 실력을 양성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옳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저술하였다. | |||||||
정조가《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고 하교하였다 | 1793년 가을 면천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월급을 덜어 백성을 구했다 | 1793 | |||||||
면천군수(충남당진시면천면) | 61세 | 1797 | |||||||
1798 | |||||||||
양양군수. 정조 죽음 | 1800 | ||||||||
1801 | 1801년 관내의 신흥사(神興寺)의 승려들이 궁속과 결탁, 폐단을 끼치자 노론벽파가 집권했음에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 ||||||||
1803 |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였다 | ||||||||
1805 |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였다. 1805년(순조 5년) 10월 20일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 ||||||||
1826 | 1826년 아들 박종채가 그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문집을 편찬하려 했다가 내용을 보고 놀라 아버지의 저서들을 간행하지 못했다 | ||||||||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10]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 | 홍대용과 함께 땅이 평평하지 않고 원형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가 가지는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고종 때 의정부우의정에 올랐지만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려다가 편찬을 그만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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